Philosophical walk

<사디스트>

3 빅토르위고 2 309 1 0

<사디스트>


논쟁에서 이기거나, 싸움에서 이기거나. 상대방의 우위에 있는 기분.

내 사디즘은 무엇에서 기인했는가. 소년기의 아버지의 학대, 선생들의 체벌 따위에 반항할 수 없던 어린아이는 이 삐뚤어진 가학적인 자아를 갖게된 것인가.

스파링에서 상대방을 패는 것에 대한 즐거움, 여자친구와 가학적인 성관계의 즐거움, 독서 모임에서의 논쟁에서 내 의견을 논리적으로 관철시켜 상대방이 납득하게 만드는 것에 즐거움.

사디즘의 본질은 남에게 고통을 주는 것에서 즐거움 이에 쾌락을 느끼는 것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이 승리, 쾌락, 즐거움이란 유희가 지나가고 언제나 마주하게 되는 내가 고통을 준 상대에 대한 미안함, 슬픔, 나 자신에 대한 책망 따위의 감정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또한 유아기와 소년기를 거쳐 학습되어진 사회화된 감정인가.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란 말인가. 나라는 인간의 기질인가.

내 유전자에 각인된, 남자로 태어났기에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러운 호르몬의 생태학적인 이유로 내가 사디스트일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나의 가학적인 행동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없다. 가학적인 즐거움 뒤 상대에게 슬픔, 미안함을 느끼는 것은 내가 사회화된 동물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언제부터 이토록 번영하며 공동체를 이루고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가.

불과 수 십년 전조차도 전쟁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였다. 침략, 약탈, 살육, 강간. 이 것이 인간의 본연의 모습인가?

본연의 모습 중 일부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지. 역사가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음과 양, 고통과 행복, 흑과 백, 선과 악.

나는 어떤식으로든 이 세상에서 어떻게든 균형을 잡고 있는 것이겠지.


"완전한 악인도, 완전한 선인도 없다."


나는 이 불안전한 감정의 주기(Cycle)를 불쾌하게 받아들이거나 거부하지 말고 내 인생에 필연적인 세상의 이치로 받아들하는가.


나를 이해하는 것. 내 감정을 이해하고, 나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 내가 의식하고 있음을 의식하는 것.

나를 이해하며, 나는 너를 이해하게 된다.

고통 없이 사랑할 수 있을까. 그것이 과연 가치 있는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영원히 살 수 없기에 매 순간이 가치 있는 것처럼.

영원히 사랑 할 수 없기에 고통조차 삼켜 사랑해야겠지.


세상의 풍파속에서도 휘둘리지 않는 고요함을 갖고 있는 인간상.


1. 삶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감정의 문을 닫아 버린 인간상.

2. 삶의 주는 고통, 행복, 슬픔 이 모든 것들을 삶의 목적으로 받아들이고 고통에서 조차, 슬픔에서 조차 아름다움을 느끼며 모든 감정들로부터 초연한 인간상 : 득도, 경지에 오른 성인.


이 두 인간상에 공통점이 있다면, 더 이상 발전이 없는 존재라는 것이겠지. 어떤 것조차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라면.

나는 내가 불안전한 존재임을 안다.

그리고 나는 삶이 주는 고통을 거부하고 마음을 닫는 사람이 아닌, 고통을 받아들이고 거기서 아름다움을 찾는 존재로써 삶에 초연한 성인이 되는 길을 택하겠다. 

그리고 만에 하나 내가 그러한 위치까지 도달하게 되더라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소년이 되어 방황하기를 택하겠다.


나는 사디스트인가? 그렇다.

나는 마조히스트인가? 그렇다.

나는 좋은 사람인가? 그렇다.

나는 나쁜 사람인가? 그렇다.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정의 되는가?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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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1 보스턴피자 2024.10.12 02:43  
새벽 시간, 너도 방황하는구나.
나는 이것을 성장이라 말하고 싶다.
2 소년 2024.10.12 03:18  
소년이여! 어른이 되기를 두려워하지 마라.
어른이 된 소년이여! 더 이상 어른이 된 소년에 의심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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